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톤 브루크너 (문단 편집) == 사후의 재평가 == 브루크너의 음악은 사후 수십 년이 지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음악계의 논쟁 떡밥으로 등장했지만, 논쟁이 격화될 수록 음악에 대한 수요도 늘어났다. 1930년대에는 제자들이 멋대로 개정한 악보 대신 브루크너의 자필보에 의거한 공식적인 원전판 악보들이 간행되기 시작했고, 이와 함께 브루크너 음악을 바그너화하던 관행도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처음으로 출판된 초판들이 완전히 도태된 것은 아니다. 4번과 5번의 경우 몇몇 지휘자들은 원전판을 기본으로 쓰면서도 무단 개정판에서 더 효과적인 대목이나 아이디어를 차용하고 있다. 물론 9번 뢰베판은 브루크너의 사후에 개정되어 [[원작파괴]]가 유난히 심하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아예 연주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아이디어 차용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나치의 득세로 인한 브루크너 음악의 곡해도 진행되었는데, 나치는 브루크너가 [[아돌프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바그네리안]]이었다는 것을 강조시키며 독일 음악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선전에 브루크너를 이용했다. 프로 관현악단들 뿐 아니라 나치 [[슈츠슈타펠|친위대]]나 [[SA|돌격대]] 산하 음악대도 정치 집회에서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연주했고, 심지어 친나치 어용 음악학자들에 의해 브루크너 음악과 [[반유대주의]]를 억지로 끼워맞춘 논문들이 발표되는 등 졸렬한 행위들까지 벌어졌다. 설상가상으로 국제 브루크너 협회의 초기 편집자였던 로베르트 하스도 1933년에 [[주화입마]]하면서 나치에 입당했는데,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나치 입당은 불법이었기 때문에 전후에 신나게 까였고 브루크너 협회는 물론이고 교직에서도 강제 은퇴당해 야인으로 여생을 보내야 했다.[* 전후 오스트리아의 미적지근한 나치 잔재 청산 움직임과 맞물려 오스트리아에서 1938년의 합방(안슐루스) 이전 나치에 입당한 이들은 같은 시기 독일의 나치 입당자보다 더 강한 비판을 받고 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금까지도 비판받고 있는 것도 비합법 정당에 불법 가입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물론 하스의 브루크너 작품 편집이 사료에 기반한 객관성 보다는 하스 자신이 소위 '영적인' 면으로 접근한다며 여러 판본을 뒤섞어 모호하게 만들거나 심지어 자신이 가필까지 하는 등 비학문적이었다는 점이 하스판에 대한 중요한 비판의 준거로 사용되고 있지만, 하스의 나치 전력 역시 정치적으로 큰 문제를 야기시켰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이랬던 탓에 [[제2차 세계 대전|2차대전]] 종전 후 연합국에서 잠시 브루크너 음악에 대한 보이콧이 진행되기도 했지만, 바그너와 달리 공공연히 반유대주의를 천명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얼마 가지 못했다. 정치적 논란보다도 브루크너 음악 특유의 개성이 대중들에게 어필하는 과정이 상당히 험난했다. 브루크너 작품들의 사후 재평가라는 것도 오랫동안 독일과 오스트리아, 스위스 같은 독어권 국가에 국한된 것이었고, 그 이외의 지역에서는 정말 드물게 연주되었다. [[음반]] 같은 경우에는 더더욱 더디게 나왔는데, 당시 한 면에 4분 30초 정도까지만 수록할 수 있었던 [[SP(음반)|SP]] 레코드의 한계 때문에 브루크너 교향곡 한 곡을 취입하려고 해도 6~8장의 음반이 필요했다. 이렇게 녹음 작업에 몇 배의 돈과 노력이 필요한 데다가 브루크너 음악 자체도 독어권만 벗어나도 인지도가 대단히 떨어지던 상황이라, 채산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많은 음반사들이 브루크너 교향곡 음반의 제작을 꺼렸다. 그나마 교향곡 중 가장 인기있는 축에 속하는 7번은 1924년에 오스카 프리트[* 1921년에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제2번(말러)|교향곡 2번]]을, 1925년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알프스 교향곡]]을 '''SP에 전곡 취입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지휘의 베를린 국립 관현악단(슈타츠카펠레 베를린)이, 1928년에 야샤 호렌슈타인 지휘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전곡 녹음을 [[도이체 그라모폰]]에 취입해 최소 두 종류의 음반이 유통되었지만, 나머지 교향곡들은 전곡이 아닌 상대적으로 짧은 3악장 스케르초 정도만이 찔끔찔끔 나오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1930년대 후반 [[오픈릴 테이프]]와 이 테이프를 사용하는 녹음기인 마그네토폰이 독일에서 실용화되면서 방송국에서 방송용으로 녹음한 테이프들이 자료실에 쌓이기 시작했고, 나치 집권 후 브루크너 교향곡에도 바그너의 오페라 못지않은 애정을 보여준 히틀러와 여타 나치 고위층 인사의 환심을 사기 위해 텔레풍켄이나 엘렉트롤라 같은 독일 음반사들이 돈을 듬뿍 들여 오이겐 요훔과 [[카를 뵘]] 등의 지휘로 브루크너 교향곡들을 본격적으로 녹음하기 시작했다. 종전 후인 1953년 1~2월에는 스위스의 지휘자 폴크마르 안드레에가 [[빈 교향악단]]을 지휘해 빈 교통방송국(RAVAG)에 사상 최초로 교향곡 1~9번 아홉 곡의 방송용 테이프 녹음을 남겨 브루크너 교향곡 녹음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1955~62년에는 독일 지휘자 한스 로스바우트가 자신이 상임 지휘자로 재직하던 [[바덴바덴과 프라이부르크 남서독일 방송 교향악단|바덴바덴 남서방송 관현악단]]과 남서독일방송에서 마찬가지로 브루크너 교향곡 1~9번 전곡 녹음을 시도했지만, 1번 한 곡을 남겨둔 상태에서 로스바우트가 사망해 2~9번 8곡만 녹음되었다. 그러나 2장 정도면 브루크너 교향곡 1곡을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수록 시간이 훨씬 길어진 [[LP]]가 음반 포맷의 주류로 자리잡게 된 1950년대 후반 이후에도 브루크너 교향곡의 연주와 상업용 음반 녹음은 독어권 바깥에서는 상당히 드문 편이었다. 이웃나라 프랑스만 봐도 1970년대까지만 해도 브루크너 교향곡들은 거의 연주된 적이 없다. 70년대 말 [[파리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였던 [[다니엘 바렌보임]]이 교향곡 9번을 연주하기 위해 무려 15회나 리허설을 한 것만 봐도 프랑스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브루크너의 교향곡들이 얼마나 생소하고 난해한 곡으로 여겨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1960년대 이후 음반 산업이 크게 성장하면서 브루크너 작품도 서서히 세계적으로 저변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0년까지만 해도 브루크너는 돈이 안된다는 이유로 메이저 음반사에서도 적극적으로 녹음하길 꺼리는 레퍼토리에 속했다. 지휘자 왕국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1960년대말에 오이겐 요훔의 지휘로 세계 최초의 브루크너 교향곡 전집을 녹음했다. 당시 DG에서는 요훔 말고도 카라얀, 뵘이 브루크너를 녹음하길 원했지만, DG에서는 많이 팔리지도 않는 브루크너를 중복 녹음하길 꺼렸기 때문에 카라얀은 영국 음반사 EMI[* 1970년 브루크너 교향곡 4, 7번 녹음.]에서 뵘도 마찬가지로 영국 음반사 데카[* 1970, 73년 브루크너 교향곡 3번, 4번 녹음.]에서 브루크너를 녹음해야만 했다. 브루크너 교향곡 0번을 포함한 전집도 60년대 하이팅크, 70년대 아사히나 다카시의 전집이 0번을 포함해 출반되는 방식 아니고서는 단독으로 나오는 일이 거의 없다. 1970년대 이후 세계 각지에서 연주 빈도도 높아지고 음반들도 많이 쏟아져 나오면서 [[영화]]나 [[드라마]]에까지 인용될 정도의 대중성을 획득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KBS의 사극 [[불멸의 이순신]]에서 교향곡 제7번의 2악장이 삽입된 바 있다.][* [[은하영웅전설]]에서는 [[말 아데타 성역 회전]]에서 [[뷰코크]]의 전사후 제국군제독들이 기립으로 경의를 표하는 씬에서도 나온다. [[http://ghwns826.blog.me/130086344717|6분 30초 이후]]] 2000년대 후반에는 교향곡 제5번이나 제7번을 퓨전 [[재즈]]로 편곡해 연주하는 시도까지 나온 바 있다. 아시아에서는 클래식의 인기가 높은 [[일본]]에서 무시무시한 보급률을 보여주고 있는데, 현재 브루크너 교향곡의 가장 많은 음반을 출반한 지휘자도 일본인인 [[아사히나 다카시]](朝比奈隆)다. 자신이 무려 50여 년 동안 음악 감독으로 있었던 오사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무려 3차례나 1~9번 교향곡 선집을 만들었고, 이외에도 [[NHK 교향악단]]과 도쿄도 교향악단, 일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일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을 지휘해 여러 장의 음반을 제작했다. 60년대부터 브루크너 교향곡들을 꾸준히 연주해왔고 1975년을 전후로 해서는 일본에서 브루크너로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특히 오스트리아 장크트플로리안 [[수도원]]에서 열린 교향곡 7번 공연은 하스판으로 연주하고도 노바크에게 호평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렇게 브루크너 교향곡을 매우 자주 무대에 올려 대중화에 이바지한 아사히나가 2001년 세상을 뜬 이후에도 일본의 브루크너 열기는 좀처럼 식을 줄 모르는 상태인데, 도쿄도 교향악단은 후술할 엘리아후 인발을, 도쿄 교향악단은 위베르 수당을 상임 지휘자로 초빙해 브루크너 교향곡 연속 연주회를 개최하고 그 실황으로 음반을 열심히 찍어내고 있다. 2020년대 들어서도 도쿄 교향악단은 조너선 노트를 음악 감독으로 영입해 브루크너 공연을 지속적으로 열고 있다. 한국에서는 브루크너 음악에 대한 보급이 다소 늦은 편이었는데, 1971년에 국립교향악단(현 [[KBS 교향악단]])이 당시 상임 지휘자였던 홍연택의 지휘로 교향곡 8번을, 1973년에 [[국립극장]] 개관 기념 음악회에서 4번을 초연하는 등의 움직임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공연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였다. 90년대 들어 브루크너 교향곡의 연주 빈도도 제법 늘어났지만 90년대 후반부터 급작스럽게 붐을 일으킨 말러에 비하면 공연 빈도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특히 연주상의 길이나 난이도 때문인지 대표작인 제8번의 공연이 당최 이루어지지 않았다. 1971년 9월 20일에 홍연택이 8번을 초연한 이래 2번째로 우리나라에서 동곡이 연주된 것은 무려 '''31년''' 만인 2002년 4월 25일에 있던 알렉산더 리브라이히 지휘로 성사된 융에 도이치 필하모니의 내한공연이었다. 2004년부터 2008년까지는 이동호 지휘의 [[제주도립교향악단]](구 제주 시립 교향악단)이 한국 최초로 교향곡 11곡 전곡을 완주하고 그 실황녹음들로 세계에서 5번째, 아시아에서 최초로 브루크너 교향곡 전집 녹음을 만들어 [[CD]]를 내놓았다. 현재 11곡 전곡을 녹음한 지휘자들은 엘리아후 인발[* 교향곡 3번, 4번, 8번의 초판본을 세계 최초로 녹음한 지휘자이기도 하다.]과 겐나디 로제스트벤스키, 스타니수아프 스크로바체프스키, [[게오르크 틴트너]], 이동호, 마르쿠스 보슈, 시모네 영, 게르트 샬러 8명뿐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진귀한 기록인 셈이다.[* 다만 시판품이 아닌 악단에서 활동 기록용으로 자체 제작한 비매품이고, 악단 측에 직접 주문해야 소량을 구할 수 있을 뿐이다. 아직까지 상업화의 움직임은 없는 상황. 그리고 브루크너의 교향곡 중 3번 이전의 작품들은 습작에 가까운 대접을 받는 경향이 있으며, 실제로 그다지 인기도 없다. 브루크너 교향곡의 대가인 여러 지휘자들도 00, 0번은 물론, 1, 2번도 아예 연주하지 않거나 녹음을 남기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위에 언급된 8명의 지휘자들이 브루크너 교향곡의 절대 권위자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제주도향 이후에는 [[부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뒤이어 1~9번 연속 연주회를 진행했고, 해당 악단의 수장이었던 임헌정이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로 이임한 뒤 2014~16년 동안 다시 1~9번 연속 연주회를 개최했다.[* 임헌정 입장에서는 첫 완주로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부천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으로 재직 당시에 건강 문제로 1, 2번은 다른 지휘자가 맡았다.]이외에도 박은성이나 금노상, 정치용 같은 오스트리아 유학파 지휘자들도 곧잘 공연하고 있다. 다만 곡들의 연주 시간이 꽤나 길고 다른 낭만주의 시대의 곡들보다는 자극적인 요소가 적은 편이라, 공연장에서 꾸벅꾸벅 졸거나 지루함을 참지 못해 나가는 청중들도 종종 보이고 있다.[* 5번이나 8번 교향곡의 경우 평균 연주 시간이 75~80분 가량이다.] 2017년 6월에는 [[성시연]]이 이끄는 경기 필하모닉을 시작으로, 서울 시향과 KBS 교향악단이 차례로 브루크너의 작품들 중 가장 유명한 교향곡 제7번을 연주할 예정이어서 주목되고 있다.[* 무슨 곡인지 설명하자면, 1악장은 [[은하영웅전설]]에서 라인하르트가 죽어가는 키르히아이스와 마지막 대화를 나눌 때 나오는 음악이다. 또한 2악장은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비장함이 감도는 장면에서 자주 등장하는 음악이다. 그리고 3악장은 역시 [[은하영웅전설]]에서 로이엔탈이 란테마리오 회전에서 미터마이어, 비텐펠트 등과 결전을 벌일 때 나오는 음악이다.] 2019년 11월에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내한 공연을 열고 교향곡 제8번을 연주했고 2021년 초에는 [[안드리스 넬손스]]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가 브루크너 교향곡 제8번과 9번을 연주할 예정으로 외국 오케의 내한공연에서 브루크너 교향곡이 연주되는 빈도도 늘어나고 있다. '''[[북한]]'''에서도 브루크너 교향곡이 연주된 적이 있다고 한다.[* 북한이 현존하는 최악의 기독교 탄압 국가라는 것을 대조하면 묘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다.] 정확히는 브루크너 8번의 한국 재연으로부터 1주일 전인 2002년 4월 18일 리브라이히와 융에 도이치 필하모니의 연주로 [[평양]]에서 브루크너 8번이 연주되었다고 하는데,[* 이 남북한 순회 연주회는 독일문화원과 독일 학술교류처가 마련한 '코리아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브루크너 8번의 북한 초연은 2013년에야 초연된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베토벤)|교향곡 9번]]보다도 11년 일렀다.] 다만 이 연주 이후로 북한에서 브루크너 교향곡은 20년 넘게 연주되지 못하는 상황이다. 브루크너의 팬들을 일컬어 [[브루크네리안]]이라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